1980년대 이후 한국 대중만화의 전성시대를 펼친 주인공. 1982년 발표된 「공포의 외인구단」은 우리 만화사에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겼다. 우선, 성인독자층을 만화방으로 끌어들여 소위 「어른독자도 만화보는 시대」를 열었다. 또 「공포의 외인구단」은 대중문화산업의 다른 영역간 상품화 리사이클링으로 확대재생산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만화원작을 토대로 실사영화(實寫映畵)가 만들어져 빅 히트했나하면, 만화의 테마는 대중가요로도 만들어져 또 한 차례 히트했다. 이와 함께 작가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기인」의 반열에 올랐다. 작가은 공포의 외인구단이 히트하면서 CF모델로 활동하는가 하면 각종 매체의 단골 취재원으로 등장, 기존의 영화ㆍTV 스타 못지 않은 대중의 시선을 끌었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1980년대 한국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icon)가운데 하나였으며, 이런 신드롬은 만화매체가 주류(主流) 대중문화상품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쾌거로 꼽힐 만하다.
「외인구단 신드롬」은 만화계 내부에서도 위세를 과시했다. 1980년대-1990년대를 잇는 한국 청소년 만화의 캐릭터는 상당수가 「까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1960년대 「땡이 전성기」시절 한국 어린이만화의 대다수가 「땡이 아류」(亞流)였던 기억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 사건이었다. 작가 이현세는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고 「공장만화」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말미암아 지금도 우리 만화방만화에서 「이현세 스타일」의 그림은 지속적으로 확대재생산 되고있다. 이현세는 1980년대 이후 10여 년간 우리 만화 판을 이끈 「기관차」였다.
1980년대 이후 한국 대중만화의 전성시대를 펼친 주인공. 1982년 발표된 「공포의 외인구단」은 우리 만화사에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겼다. 우선, 성인독자층을 만화방으로 끌어들여 소위 「어른독자도 만화보는 시대」를 열었다. 또 「공포의 외인구단」은 대중문화산업의 다른 영역간 상품화 리사이클링으로 확대재생산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만화원작을 토대로 실사영화(實寫映畵)가 만들어져 빅 히트했나하면, 만화의 테마는 대중가요로도 만들어져 또 한 차례 히트했다. 이와 함께 작가도 스포트라이트...
1980년대 이후 한국 대중만화의 전성시대를 펼친 주인공. 1982년 발표된 「공포의 외인구단」은 우리 만화사에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겼다. 우선, 성인독자층을 만화방으로 끌어들여 소위 「어른독자도 만화보는 시대」를 열었다. 또 「공포의 외인구단」은 대중문화산업의 다른 영역간 상품화 리사이클링으로 확대재생산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만화원작을 토대로 실사영화(實寫映畵)가 만들어져 빅 히트했나하면, 만화의 테마는 대중가요로도 만들어져 또 한 차례 히트했다. 이와 함께 작가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기인」의 반열에 올랐다. 작가은 공포의 외인구단이 히트하면서 CF모델로 활동하는가 하면 각종 매체의 단골 취재원으로 등장, 기존의 영화ㆍTV 스타 못지 않은 대중의 시선을 끌었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1980년대 한국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icon)가운데 하나였으며, 이런 신드롬은 만화매체가 주류(主流) 대중문화상품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쾌거로 꼽힐 만하다.
「외인구단 신드롬」은 만화계 내부에서도 위세를 과시했다. 1980년대-1990년대를 잇는 한국 청소년 만화의 캐릭터는 상당수가 「까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1960년대 「땡이 전성기」시절 한국 어린이만화의 대다수가 「땡이 아류」(亞流)였던 기억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 사건이었다. 작가 이현세는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고 「공장만화」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말미암아 지금도 우리 만화방만화에서 「이현세 스타일」의 그림은 지속적으로 확대재생산 되고있다. 이현세는 1980년대 이후 10여 년간 우리 만화 판을 이끈 「기관차」였다.